말하지 않을 비밀 [이든다니엘x성하라 커미션 by.낄님]
말하지 않을 비밀
commission by. 위즈비
written by. 낄
아무 생각 없이 부유하던 일상을 갑자기 현실로 끌어내린 건, 하라의 갑작스런 메시지 한 통이었다.
[오늘 에디 좀 같이 봐줄 수 있을까? 에밀리가 감기에 걸렸어. 나도 집에 있긴 할 건데, 작업할 게 많아서 도움이 필요해.]
이든은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하라는 이미 전화까지 해왔더랬다. 왠지 마음이 심란해 전화를 받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평소라면 거기서 끝이었을 텐데, 답지 않게 문자를 남기는 것으로 봐서 급한 일인 게 분명했다. 과연 뭐라고 답장을 해야 좋을까. 문득 이든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녁 늦게 눈이 온다는 일기 예보에 따라 과연, 흐린 하늘은 어쩐지 음울하고 칙칙해서, 무엇이든 선뜻 하겠다고 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인가 보다. 이든은 적당히 무언가를 하다가 늦어졌을 거라고 생각되는 시간이 흐른 뒤 답장을 보냈다.
[밖이라서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 집으로 갈게요.]
오매불망 기다렸던지 그에 대한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살았다고 울면서 하라는, 아내가 감기에 걸려 아프다며 짧게 한탄하고서 이든을 향한 감사를 표현하는 데 메시지 다섯 개를 더 썼다. 제가 하고 싶어 하는 일에 이렇게까지 고마워 할 필요 없는데. 하라는 결혼 이전이나 이후나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이든은 어쩔 수 없이 작게 웃고서 하라의 집으로 돌아섰다. 가기 전에 감기에 좋은 과일 주스와 간단한 먹거리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에드!”
“아바!”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무섭도록 닮은 두 부녀가 달려 나와 이든을 맞았다. 한순간 이든이 당황해 어깨를 굳혔을 정도였다. 에디스는 이든에게 몸을 기울이다 하라의 품에서 떨어질 뻔 했다. 떨어지려는 아이를 수습해 고쳐 안으며 하라가 지친 미소를 지었다.
“미안. 에밀리도 나와서 인사를 해야 되는데, 자고 있어서 못 깨웠어.”
이든은 기겁했다. 아픈 사이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인사를 하러 와야 한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괜찮아요. 아픈 사람이 인사는 뭐하러 합니까. 힘들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환하게 웃는 하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수척한 것 같았다. 이든은 무심코 그 얼굴로 손을 뻗으려다 황급히 멈췄다. 이 행동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무안해진 손을 감추며 이든은 말을 돌렸다.
“뭐부터 해야 할까요? 할 게 많습니까?”
하라가 탐탁찮은 얼굴을 했다. 그는 문을 더 열어서 이든이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넓혀주고 물었다.
“오자마자 일부터 하게? 잠깐 쉬지.”
“먼 길을 온 것도 아닌데, 할 일을 먼저 하는 게 낫습니다.”
그러자 하라의 얼굴에 여러 표정이 지나갔다. 어느 쪽이 이든에게 더 편할지 계산하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그 상냥함은 퇴색되거나 약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작은 배려에도 설레 버리는 걸 들켜선 안 된다. 지그시 다물리는 입술에서 애써 눈을 떼고 이든은 아무 말도 못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하라가 씩 웃었다.
“그럼 우선 에디 이유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 좀 도와줘.”
“그러겠습니다.”
할 일이 떨어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이의 이유식을 만드는 것이야 그다지 어렵지 않을 테니 얼른 끝내고 청소를 도운 뒤 에디스를 봐주면 되겠지. 이든은 쉽게 생각하며 집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하라의 집 주방은 거실의 소파가 잘 보이는 아일랜드식 구조였다. 아이가 있는 집이다보니 어느 곳에서든 아이가 잘 보이게 고려했으리라. 이든은 싱크대의 배치 하나에서도 느껴지는 하라 부부의 사랑을 새삼 느끼며, 그 주방 한가운데서 어정쩡하게 섰다. 익숙하지 않은 곳인데다 왠지 쉽사리 들어서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이곳은 하라의 아내의 공간이었다. 물론 하라는 성큼성큼 걸어가 익숙하게 앞치마를 두르며 볼을 건넸다.
“이 쌀 좀 씻어줘, 에드.”
“네.”
이든은 자신만만하게 받아들었다가 멈칫했다. 대충 밥솥과 쌀의 관계에 대해 이론으로는 알지만, 이든은 한 번도 쌀을 씻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뭐, 음식이니 야채를 씻듯이 빡빡 씻으면 되겠지. 이든은 아무 생각 없이 잘 씻어보려 물을 세게 틀었다가 금세 후회했다. 세찬 물살에 쌀을 때리고 튕겨져 나가, 무수한 쌀알이 싱크대로 와르르 쏟아진 것이다. 야채를 씻는 방법으론 안 되었던가 보다. 이든은 싱크대에 하얗게 쏟아진 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거, 다시 주워서 쓸 수도 없겠지. 아이 이유식이니 더더욱.
하라의 집 식재료를 못 쓰게 만들고 말았다. 죽음으로 사죄해야 하는 엄청난 죄처럼 느껴졌다. 황망해진 이든의 어깨 너머에서 하라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는 화내거나 놀라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쏟아진 쌀에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냈다.
“세상에, 이런 실수는 만화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정말 일어나는구나.”
이든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제가 쌀을 씻어본 적이 없어서...”
“괜찮아, 다시 씻으면 되지. 이번엔 씻는 건 내가 할게.”
하라가 너그럽게 웃으며 이든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 들었다. 이든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자기가 하겠다고 감히 주장하지도 못했다. 또 어설프게 도전했다가 쌀을 쏟으면 큰일이지 않은가. 다만 싱크대와 냉장고를 오갈 뿐,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에게 하라가 다시금 요청했다.
“거기 문 열면 쌀 저장칸이 있는데, 쌀 좀 꺼내줄래?”
“네.”
뭐든 시켜준다는 게 감사해서 이든은 열의에 가득 차 쌀을 펐다. 하라의 집 밥솥 크기를 감안하여, 커다란 볼에 수북하게 담아 그럴싸하게 다듬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예쁜 쌀 무더기였다. 이렇게 모양도 완벽하다고 자신만만해서 가져갔으나 결과는 이번에도 시원치 않았다. 하라는 미간을 지그시 모으며 감탄했다.
“와. 이 정도면 우리 에디가 어른이 될 때까지 먹겠어.”
양이 많다는 뜻인가? 이든은 멀뚱멀뚱 손에 든 그릇과 밥솥을 번갈아 보았다. 밥솥에 넉넉하게 들어가고도 남을 텐데 이게 왜 많은 양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밥그릇으로 네 번만 펐는데, 그렇게 많은 건가요?”
하라가 소리 내어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으로 충분해. 쌀은 불어나니까. 이 만한 쌀로 밥을 지으면 밥솥이 넘쳐서 안 될걸.”
“.......”
딱히 밥알과 쌀알의 크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게 불어난단 말이지. 이든은 결국 하라가 쌀을 다시 덜어내는 걸 보며 민망해졌다. 일을 도우러 왔는데 괜히 하라에게 일만 더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정작 하라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 했지만. 더 이상 자신에게 쌀과 관련한 일을 시키지 않는 점이 마음 쓰였다.
결국 이든에게는 고기를 잘게 다지라는 새로운 임무가 내려졌다. 이것만은 자신 있는 일이었으므로, 이든은 모래알처럼 잘게 힘줄 하나 없이 고기를 다지는 것에 열중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결과물은 하라가 감탄하며 돌려볼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진짜 잘 했네. 꼭 기계로 다진 거 같다. 힘이 좋아서 그런가? 고마워.”
“괜찮습니다.”
“이제 나머지는 내가 할게. 아이가 먹는 거라 이것저것 복잡해서 내가 해야 돼.”
하라가 말갛게 웃고서 부엌으로 돌아갔다. 이든은 하라의 말 하나하나를 복기하며 곱씹다가 씁쓸해졌다. 고맙다고 하는 하라의 말은 달콤했다. 하지만 불량식품을 먹고 난 뒤처럼, 미묘한 뒷맛이 몰려왔다. 그와 함께 요리를 만드는 순간은 달콤하기 그지없지만 자신이 이 부엌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하라가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제 삶 전부를 바쳐서라도 그 옆에 머무를 텐데. 이제는 이 삶을 바칠 사람이 없다.
이든은 잠깐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고 애써 부엌에서 벗어났다.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그저 그가 부탁한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데에만 집중하면 된다.
사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뿐이다.
* *
하라는 오늘 한국에 있는 동료와 화상 회의가 있다고 했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다만 회의 중에는 에디스를 데리고 있을 수 없으므로 이든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부탁한다고 말하고 돌아서는 순간 하라의 얼굴은 아빠가 아닌 능력 있는 사회인으로 변해 날카롭게 빛났다. 이든은 하라가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에디스를 데리고 놀이방으로 향했다.
어린아이의 방은 하라와 그녀가 정성껏 준비한 수많은 총천연색 장난감으로 가득했다. 다양한 옷을 입은 테디베어 여러 개와, 색색의 기차 모형과, 심지어 찰흙놀이 세트까지. 이든은 장난감 하나당 오 분씩만 놀아도 두 시간은 넉넉하겠다고 쉽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 있게 가까운 장난감부터 집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에디스가 도통 기차 장난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래, 다른 걸로 놀까?”
애써 말했지만 이 역시 난관이 있었다. 이든은 여기 있는 장난감의 작동법을 절반도 몰랐다. 그나마 자신 있고 잘하는 공놀이라도 먼저 해줄까 싶어, 공을 집어 들었지만 에디스는 영 반응이 없었다. 탄성이 없는 푹신한 공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걸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든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도 재미없는데 너도 그렇겠지.”
이든은 잘 튀겨지지도 않는 공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가장 무난하게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블록을 집어 들었다.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미적 감각을 동원하여 그럴싸한 성을 쌓기 시작했지만, 아쉽게도 이 역시 에디스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하라가 사라진 방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엄마와 아빠가 의아한지 에디스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에디, 이쪽 보자. 아빠는 지금 바빠.”
이든이 다정하게 에디스를 부르며 관심을 끌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에디스는 이든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만 갸웃거리다 이내 뒤뚱뒤뚱 제 엄마의 방으로 걸어갔다. 이대로라면 환자를 깨우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든은 에디스가 혹시 넘어질까 싶어, 감히 손을 대어 저지하지도 못했다. 그저 넘어지면 바로 안을 수 있도록 어설프게 손을 낮춘 채 뒤를 따라갈 따름이었다. 에디스는 이윽고 제 엄마의 방으로 가서 문을 짚었다. 그 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는 눈치라 이든은 고개를 젓는다.
“안 돼, 에디. 엄마가 아프다고 하니, 오늘은 따로 놀자.”
“우우.”
에디스가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든은 단호했다. 아픈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불려온 처지에, 아픈 사람의 방에 아이를 밀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을 한참 노려보는 에디스의 눈빛이 가슴 아팠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든은 팔을 엑스 자로 만들어 완강한 거절을 표시했다. 그러자 에디스가 방향을 돌려 향한 곳은 하라의 방이었다.
“안 돼, 에디. 아빠도 바쁘대. 잠깐만 나랑 있자.”
이든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에디스를 돌려 세웠다. 에디스의 커다란 눈에 의아함과 눈물이 그렁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보고 싶을 텐데 안 된다고만 하니 서러운 모양이었다. 이든은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안타까웠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디스를 향해 어설픈 웃음만 지어보일 뿐.
그러자 에디스는 소파로 달려가 그 아래에 털퍽 드러누웠다. 나름 서럽다는 뜻인가 보다. 아빠랑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먹이는 에디를 보면, 이든이라고 편할 리 없었다. 안타깝고 마음이 안 좋았다. 할 수 있다면 당장 문을 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픈 사람과 바쁜 사람을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이든은 드러누운 아이를 위해 동영상이라도 보여줄까 싶어 아이패드를 가져왔다. 이든의 걸음으로 열 걸음 정도, 십 초가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건지, 에디스는 어디선가 집어든 립스틱으로 바닥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든은 바닥에 죽죽 그어지는 시뻘건 선이 제 마음에도 그어지는 느낌에 경악했다.
“에디!”
“으응?”
그 와중에도 소리를 낮추고 비명을 지른 자신이 용했다. 이든은 아이패드를 놓고 최대한 살살 아이의 손에서 립스틱을 뺏었지만, 이미 립스틱은 뭉개질 대로 뭉개져 더는 쓸 수 없었다. 이든은 머리가 아뜩해 이마를 쥐었다. 망연자실한 이든이 이상했던지 에디스가 슬슬 눈치를 봤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 하라의 아내의 물건을 망치다니 이든은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잘못이니 사과를 하고 립스틱을 새로 사줘야 할 텐데, 자신이 어떻게 여자의 물건을 알겠는가.
“흐앙......”
분위기가 좋지 않자 에디스는 불편한 나머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든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에디스는 이미 울음을 울기 시작한 뒤였다.
“으아아아앙!”
“에디, 미안해, 미안. 잘못했어. 울지 마, 응?”
사실 이든이 미안할 건 없지만 다급하니 마구 사과가 나왔다. 당황한 손이 허둥지둥 허공을 몇 번 헛손질하고 지났다. 이든은 울지 말라고 되뇌며 에디스를 안아 들었다. 이러다 하라를 방해하고 그의 아내까지 깨우게 생겼으니 자기야말로 울음이 날 지경이었다. 이든은 한 손으로 에디스를 들고 한 손으로는 패드를 집어 유아용 동영상을 틀었다. 입으로는 내내 애원하다시피 에디스를 달래는 채였다.
“흐아아아앙!”
하지만 에디스는 진정할 줄 모르고 계속 울었다. 한 손으로 어설프게 안아드는 폼이 불편해서 그런 줄 모르고, 이든은 허둥지둥 에디스를 안은 채 방 안을 돌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렇게 하면 울음을 그치던데 에디스는 더 울기만 했다.
결국 하라의 방문이 열리고야 말았다. 이든은 정신이 반쯤 나가서, 방에서 나오는 하라를 바라보았다. 회의를 중단한 것인지 일이 다 끝난 것인지 모르겠으니 마냥 반가워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라는 의아해 보일 뿐 화난 것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이든에게서 에디스를 받아들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에디가 장난을 치는 걸 못 말렸어요. 미안해요. 바닥은 내가 닦겠습니다.”
이든은 엉망이 된 방바닥을 고갯짓하며 사과했다. 하라의 눈이 잠시 엉망인 바닥으로 향했다가,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었다. 왠지 재밌어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하라는 미안할 거 없다며 이든에게 말했다.
“너 꼭 주인을 보고 쫓아오는 강아지 같다.”
“예?”
이든이 눈썹을 찡그렸지만 하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에디스를 부드럽고 능숙하게 끌어안으며 어를 따름이었다. 부드러운 키스가 하얀 뺨에 몇 번이나 떨어졌다.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을 찔끔 매단 채 서럽게 울던 에디스는, 하라의 능숙한 손놀림에 조금씩 진정해갔다. 하라가 부드러운 이마에 키스하고 볼을 부볐다.
“예쁜 에디가 왜 울까요? 응? 에드가 괴롭혔나, 우리 예쁜 에디를?”
“아니 전...”
“알아, 알아. 네가 안 그런 거. 하지만 에디는 아마 네 눈치를 보느라 더 우는 걸 거야. 예쁘다고 달래줘.”
“아......”
아이도 사람을 봐 가면서 우는구나. 이든은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서 울먹이는 아이를 봤다. 예뻤다. 굳이 하라가 달래주라고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이든의 눈에 정말이지 예뻤다. 자꾸만 손이 가고 마음이 가서, 곤란할 지경이었다. 어디를 봐도 하라와 닮은 구석으로 가득한 아이를 어떻게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이제는 하라도 만질 수 없는 자신이 그의 딸을 마냥 예뻐할 자격이나 있을지 곤혹스러울 뿐. 이든은 망설이는 손가락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어설프게 웃었다. 조심스런 마음에 얼굴이 굳어지고 손가락이 뻣뻣해지지만, 최선을 다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디는 예뻐. 내가 본 중에서 제일. 그러니까 울지 마, 응? 예쁜 아가는 우는 거 아냐.”
“바아!”
에디스는 비로소 울음을 그치고 웃었다. 그에 이든은 아주 잠깐 제 처지도 잊고 황홀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하라도 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립스틱은 신경 쓰지 마. 에밀리는 그런 거 아마 열 개는 더 갖고 있을 거고, 설령 하나뿐이래도 에디가 그런 걸.”
하라는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러겠어요. 나중에 같은 걸로 하나 더 사오겠습니다. 이름만 알려주세요.”
“음. 사실 나도 그 립스틱 브랜드랑 이름 몰라서 안 돼.”
“......”
장황한 이름으로 가득한 여성용 화장품을, 제품 넘버까지 꿰고 있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든은 나중에 돈이라도 전해주며 사과하겠다고 결심했다.
* *
아예 하라는 방에 들어가는 대신 거실에 앉아 작업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에디스를 무릎에 앉혀놓고 노트북을 두드리는 자세가 꽤 능숙해 보였다. 이든은 그 사이에 얼른 엉망이 된 바닥을 닦아냈다. 그 다음 에디스를 조심스레 받아들자, 이번에는 에디스가 울지 않아서 이든은 기뻐졌다. 그는 하라의 코치를 받아 제법 그럴싸한 폼으로 에디스를 안아들고 물었다.
“차 한 잔 드실래요?”
“좋아!”
하라가 좋아하는 차가 뭔지는 진작 알았으므로 뭘 먹을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아이와 놀아줘야 하니 혹시 몰라 제 몫의 차는 끓이지 않고서, 이든은 하라에게 홍차 한 잔을 건넸다. 하라는 정작 찻잔이 놓이는 줄도 모르는 채 일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든은 하라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아이 돌보기에 집중했다. 에디스를 끌어안은 채 방을 몇 바퀴 빙글빙글 돌았고, 집안 물건 이것저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다 에디스가 방구석에 놓인 테디베어에 손을 뻗으며 흥미를 보였으므로 이번에는 인형 놀이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든은 방을 돌며 인형 네다섯 개를 더 모아 왔다. 그리고 에디스의 앞에 주르륵 놓은 뒤, 가장 큰 곰을 집어 들고 에디스의 이름을 불렀다. 에디스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커다란 덩치로 테디 베어를 들고 있는 자신이 못 봐줄 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에디스의 붉은 눈은 즐거워보였으므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에디는 볼이 통통하고, 눈도 빨갛고 예쁘지. 손가락도 짧고 귀여워.”
최선을 다해 에디스의 어디가 귀여운지 곰인형 뒤에서 속삭이는 이든을 보며, 에디스는 환하게 웃다가 말했다.
“아바!”
“......”
이든은 곰인형을 든 채 굳어졌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에디의 아빠가 아냐. 아빠는 저기.”
“왜 네가 아빠가 아냐?”
하라를 가리킬 셈이었는데 그는 어느새 소파를 벗어나 등 뒤로 다가온 참이었다. 그가 이든의 옆에 놓인 곰인형 하나를 집어 들며 웃었다.
“넌 에디의 대부잖아. 그러니까 아빠지.”
“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든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채 굳었다. 대부가 되기를 부탁 받았을 때 기뻤다. 그런데 기쁘지 않았다. 하고 싶었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에디스의 아버지보다는 하라의 배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가정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적임자는, 누구보다 그들이 행복하길 바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기에 대부를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정말로 에디스의 아빠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감히 그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이런 완벽한 가정에 눈치 없이 끼어든 불청객이나 아니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든은 하라의 웃는 얼굴을 망가뜨리기 싫어 애매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대부도 아빠는 아빠니까요.”
이든은 하라가 들고 있는 곰인형에, 자신이 든 곰인형의 손을 얹어 보았다. 자신과 하라와 에디스. 세 사람이 있는 지금 이 순간은 분명 평화롭고 안락했다. 그것은 곰인형이 부드럽고 푹신한 것만큼이나 분명했다. 그래도 단 하나만은. 이제 하라는 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은 약간 슬펐다.
* *
조금 더 있다가 가고 싶지만, 하라의 아내가 일어나기 전에 가고 싶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그녀를 마주할 때 완벽한 표정을 지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적당한 타이밍이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려고 하면 하라가 먹을 걸 권했고, 짐을 챙기려 하면 에디스가 뒤뚱뒤뚱 걷다가 비틀거렸다. 이든은 쉰 번쯤 망설이다가 쉰한 번째에야 드디어, 하라에게 이제는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자 하라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붙잡았다.
“식사라도 하고 가지.”
“집에 환자가 있는데 그럴 순 없습니다. 마치지 못한 일이 있기도 하고요.”
사실 마치지 못한 일은 없었지만 여유롭다고 말했다간 오늘 자고 가라고 할 태세였다. 과연 하라는 일이 있다는 말에 더 붙잡지 못했다. 미안한 표정을 지을 뿐.
“미안해, 내가 너무 오래 잡았지. 너도 많이 바쁠 텐데.”
“괜찮습니다. 성하라 씨가 부르는 것보다 바쁜 일이 있겠어요?”
진심이었지만 하라는 까르르 웃을 따름이었다. 그의 웃음은 언제 봐도 제 웃음보다 뿌듯했으나 예상치 못한 여파를 몰고 왔다. 웃음소리가 생각보다 컸던 탓인지, 방문이 열리고 에밀리가 비틀거리며 흐트러진 차림으로 나왔던 것이다. 아픈 기색이 완연한 창백한 얼굴을 보자 조금 안쓰러웠다. 평소의 강단지고 화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초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피아니스트도 몸을 혹사하는 직업이라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앓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이든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안녕하세요. 몸이 안 좋아 이제 인사하네요,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개의치 않습니다. 에밀리 씨야말로 더 쉬셔야 할 텐데요.”
이든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라가 이든을 지나쳐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일어났어? 몸은 어때?”
“어마!”
마치 자신이, 그 일부라는 착각마저 느끼게 해주었던 에디스도 그녀에게 돌아가서 팔을 뻗었다. 그것은 마치 완벽한 하나의 풍경화처럼 포근하고 아름다우며 자신은 장소를 잘못 잡은 정물화의 사과처럼 발치를 굴러다니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은 벽에 잘못 걸린 그림이었다. 이든은 연신 아내를 매만지는 하라의 옆에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렸다. 그러자 에밀리가 비로소 이든을 돌아보며 민망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폐를 끼쳤군요.”
“괜찮습니다. 다음에도 불러주세요.”
다음. 이든은 그런 말을 한 걸 책망했다. 다음에도 아프기를 은연중에 바랐던 것처럼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진짜 그런 마음을 먹은 건 아니지만 제 불순한 감정 탓에 지레 찔린 것이다. 스스로가 뻔뻔스레 느껴져 환멸감까지 들었다. 그러나 하라와 그의 가족들은 제 걱정이 무안할 만치 해맑을 따름이었다.
“염치없지만 이런 일이 생기면 또 부탁할게, 에드. 대신 내가 나중에 저녁 식사 대접하게 해줘.”
하라가 이든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든은 잡힌 손을 빼지 못하고 굳었다가 간신히 딱딱한 입술을 움직였다.
“...성하라 씨가 불러 주신다면 언제든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라가 약속하는 다음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한데 왜 이리 목이 메는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하라와 에밀리는, 집에 있던 와인 한 병과 과일바구니를 이든의 손에 들려주기까지 했다. 오늘 에디스를 봐준 답례라면서. 딱히 에디스를 보느라 고생한 기억이 없는 이든으로서는 민망할 정도의 대접이었지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이든은 어설프게 받아들고 허리를 숙인 뒤 돌아나왔다. 단란한 가족이 문 앞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것은 동화 속 삽화 한 장면 같은 따뜻한 광경이라 황홀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콱 메었다. 크리스마스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는 환상처럼 아름다운데, 결코 자신의 몫은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든은 문 밖에서도 마음껏 슬퍼할 수 없는 자신을 향해 조소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주 멀리 걸어갔다. 그리고 하라가 절대 볼 수 없는 거리라고 생각되는 어느 지점에서야 천천히 주저앉았다.
등을 구부리고 앉아 차갑게 무너지는 뱃속을 끌어안고 바닥을 향해 얼굴을 처박았다. 행복한 가족이다. 문 앞의 기사를 자청하고 싶을 정도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가정이다. 이따금 그 한 조각을 함께 향유할 수 있음이 감사할 뿐이다. 그들이 성이라면 성문 앞의 차가운 조각상이 제 위치여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발자국 물러나는 순간이면, 왜 이다지도 공허한지. 한편으로 슬프고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지 미칠 노릇이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데 모든 것이 서러워서 견디기 어렵다. 아빠라고 불리면서 아빠가 될 수 없는, 그가 부르면 달려갈 수 있지만 그의 곁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이 견디기 어려워 마른 울음이 났다.
“......하.”
이내 이든은 얼룩지지 않은 깨끗한 얼굴을 들었다. 흐린 하늘을 노려보다 천천히 일어났다. 자기연민에 빠져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지쳤다. 어차피 하라가 그녀를 선택한 순간부터 마음먹은 일 아니던가. 충직한 벙어리 기사처럼 살기로. 전하지 못할 비밀을 탐닉하는 것도 지금의 이든에겐 사치였다. 모든 것은 예전에 이미 다 정리되었다. 하라가 자신을 원하지 않던 순간부터, 이 마음은 바깥에 나오는 일 없이, 저와 함께 관 속에 갇힐 것이다. 오랫동안 곱씹어 썩은 비밀 위엔 차가운 무덤 흙만 덮일 것이다. 제 마음은 무덤 위 꽃으로도 피지 않을 것이다.
아주 오랜 미래겠지만 이든은 확신하고 있었다. 마음의 주인이, 하라가 명령하지 않는 이상 기어 나오지도 못할 충직한 제 비밀을.
*이든다니엘x성하라 커미션
*이든의 짝사랑. 하라가 모브와 결혼함으로 이든과 이어지지 않았다는 설정입니다.
*하라의 2세를 돌보는 이든의 시점. 이든은 아이의 대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