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이든다니엘x성하라 커미션 by.낄님]
위즈비
2020. 7. 17. 10:36
오늘 밤은 나와 함께
commission by. 위즈비
written by. 낄
죽음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본래 이든이라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 문제였다. 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의 사건 이후 이든은 종종 생각했다. 죽음이 삶에 끼치는 영향. 죽기 위해 살아남은 건 아니지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적도 물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앞에 둔 죽음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을 위해 죽음도 무릅쓸 수 있는 종자라는 것을. 사람에게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마주하는 본성이 있다. 이든의 경우에는,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그에 대면 하라의 부모님을 만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려 애쓰지만, 이든은 알아 버렸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없다!
하라는 중요한 말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뒤에 슬그머니 흘리는 때가 많다. 결코 골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점이 그다운 점이다. 이든은 몇 번쯤 그 화술에 넘어간 적이 있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오늘 일찍 들어 와, 보고 싶으니까. 가게에 있는 걸 보고 사왔어, 네게 어울릴 거 같아서. 이번 여름휴가는 우리 집에서 보낼까? 부모님이 널 궁금해 하는데.
마지막 부분을 들을 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라가 살아온 한국은 남자와 남자 커플에 대한 반대가 무척 심하다고 들었는데. 물론 미국에서도 보수적인 지역은 한국과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면 부모님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건 엄청난 사건임이 분명했다. 이든은 하라가 분명 아무 의도 없이 흘렸을 한 마디에 일주일쯤 밤잠을 못 이루고 고민했다. 비난이 쏟아질지 한숨이 터져 나올지,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상황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했다. 설령 최악의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은 하라를 놓을 수 없다고 내뱉을 단단한 각오의 말까지 다지면서, 하라의 집 현관을 밟았던 것이다.
하지만 목소리와 억양만 살짝 다를 뿐 하라와 완벽히 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중년 여성이 다짜고짜 팔을 당기며 말하는 순간 이든은 준비해왔던 모든 말을 잊었다.
“왜 그렇게 얼어붙었어? 들어 와.”
“네, 네?”
이든은 어안이 벙벙한 채 제대로 인사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감상이 맴돌았다. 하라다. 이건 완벽히 하라의 말투다.
“들어오라니까? 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어.”
하라와 다른 색 눈동자, 다른 색 머리카락을 가진 우아한 중년 여성. 그녀의 이미지가 주는 첫인상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말투만 들어도 알겠다. 포장지만 약간 다를 뿐 내용물은 하라와 판박이인 게 분명했다. 이든은 머뭇거리며 하라를 한 번 돌아보았다. 하라가 환하게 웃으며 이든의 등짝을 팡 내려쳤다.
“뭐 해, 에드? 들어 오라시잖아. 얼른 들어가. 이러다가 해 지겠어.”
그러더니 하라는 이든을 뒤로 하고, 마치 바로 어제 왔다간 것처럼 자연스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옆에서 정말 십 년 전부터 함께 산 듯 태연히 손짓하는 하라의 어머니를 보자 이든은 깨달았다. 하라가, 둘이구나.
잠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든은 눈꺼풀 하나 깜박일 동안 마음 정리를 마쳤다. 하라가 둘이면 좋은 것이다. 생판 낯선 인격이 튀어나오는 것보다는, 그나마 좀 익숙해진 하라가 튀어나오는 게 낫지 않은가? 이든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자신이 하라를 처음 본 뒤 적응하기까지 시간과 계기가 필요했다는 진실은 잠깐 구석에 미뤄 두기로 한다. 지금은 전시에 준하는 비상사태였다. 어떻게 해서든 하라의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는 전시 상황 말이다. 이든은 너무 늦었다고 여겨지지 않을 타이밍에 필요 이상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든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든이라고 부를게.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했지만 반가워.”
“반갑게 맞아 주셔서, 네?”
이든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맥락상 많이 들었다, 라고 말해야 하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많이 듣지 못하셨다고 한다. 혹시 하라가 아무 말도 안했나? 자신은 숨겨진 애인인 걸까? 비록 부모님 집에 인사드리러 왔지만 숨겨진 애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빠지기 전 이든은 하라를 돌아보았다. 하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부모님한테 연애사를 미주알고주알 말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해야 되는 이야기는 다 드렸으니까, 장난치시는 거야. 어차피 미리 말씀 드려도 직접 보는 걸로 판단하실 거고.”
언뜻 듣기에 합리적이었으나 신음이 나올 뻔 했다. 직접 보는 걸로 판단하신다는 부분이, 암만 잘 말해줘도 소용없을 거라는 예고처럼 들렸던 탓이다.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고와 같은 건가. 이든은 창백해졌다. 하지만 하라의 어머니는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한껏 지을 따름이었다.
“뭐 어때. 아무 선입견 없이 만날 수 있으니 좋지 않니?”
“그, 그렇군요.”
사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좋은 선입견을 가져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든은 내색하지 못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라의 어머니가 2층 계단을 가리켜 손님방은 저기라고 말해주며 아무렇지 않은 투로 덧붙였다.
“방 하나만 준비했는데, 너희는 방 같이 쓸 거지?”
“네.”
“네?!”
물론 방을 같이 쓰긴 했으므로 하라는 태연하게 답했으나 이든은 태연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배려 받는 건 다른 의미로 부담스러워서, 얼굴이 시뻘게지는 그에게 하라의 어머니는 예의 그 시원스런 눈웃음을 다시 한 번 보냈다.
“농담이었단다. 하라 아버지가 방은 따로 주라고 하셨거든. 하라 넌 부모님 있는 집에서 뭘 기대한 거야.”
하라의 어머니가 하라를 슬쩍 쥐어박는 시늉을 했지만, 이든은 반응도 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이 집에서도 A부터 Z까지 허락되는 줄 알 뻔 했다. 한국은 아직 보수적인 사회로 알고 있는데 개중에 이리도 개방적인 부모님인가 싶어 어떻게 반응할지 긴장했던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말이 막혀서 다행이었다.
“엄마아빠도 같은 방 쓰는데 나랑 에드도 그럴 수 있죠.”
하라가 볼 멘 소리로 중얼대자 하라의 어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그야 그렇지만, 혼인신고 하기 전까지 내 집에선 꿈도 꾸지 말렴.”
“......”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무언가 폭풍처럼 휘몰아친 느낌이었다. 이든은 그 짧은 사이 한 가지를 눈치 챘다. 하라의 어머니가 활짝 웃을 때는 뭔가 수상쩍은 장난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걸. 하지만 알아낸 건 알아낸 거고, 현관에서 거실까지 들어오는 짧은 사이 연타를 얻어맞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허우적거리는 이든을 묵묵히 바라보던 하라의 어머니가 만족스런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지금까지 봤을 때 착하고 성실한 애로구나. 소소한 농담에도 어쩔 줄 몰라하니 재밌네.”
이든은 별로 소소한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하라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보셨군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맘에 들어. 너무 가벼운 쪽보다는 이쪽이 더 놀리는 재미가 있거든.”
솔직한 심정으론 고작 그 이유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나 커다란 이유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어머님의 성격을 봤을 때 후자일 것 같으니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이든은 토 달지 않기로 하고 하라의 어머니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저, 아버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그이한테 낯선 사람은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게 인사야. 낯을 많이 가리거든.”
“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데려온 사람을 보러 오지 않으셔도 되나? 한국인은 원래 그런가? 이든이 어안이 벙벙해하는 걸 지켜보던 하라의 어머니가 아무렇지 않게 천장 모서리 쪽을 가리켰다.
“뭐, CCTV로라도 보고 있을 테니 인사하고 싶으면 천장 보고 할래?”
“아, 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든이 엉거주춤 천장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이든 다니엘......”
“엄마.”
좀처럼 제 말을 막지 않는 하라가, 인사를 끊고 제 어머니를 나직이 부르는 순간 이든은 뭔가 깨달았다. 당황한 나머지 객관적인 모습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허공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자신이, 과연 정상으로 보일 것인가. 귀가 뜨끈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자 하라의 어머니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무는 중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세상 어떤 집이 집 안에 CCTV를 설치하니? 하라야, 쟤 너무 순진하고 귀엽다.”
“제가 바로 그 매력에 빠졌어요.”
순진하다니 맹세컨대 킨더가든 이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하라가 없는 매력에 빠져 헛 걸 봤던 게 분명하지만, 하라의 어머니에게 감히 그리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든은 아뜩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하라의 어머니가 입술을 늘어뜨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순진하고 귀엽다고 해서 화났니? 칭찬이었는데, 기분 상했으면 미안해.”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순진하고 귀여운 거 맞습니다.”
“에드 좀 적당히 놀려요. 내가 결혼하려는 사람이라고요.”
이든은 간절히 하라를 바라보았다. 적당히 말고, 아예 놀리지 말라고 해줘요. 하지만 하라는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알아차릴 마음이 없었다.
“네가 이해해. 우리 부모님이 좀 극단적이시지.”
하라가 이해하라는 듯 헤실 웃었으나 이든은 밸런스 조정이 심각하게 잘못 됐다고 생각했다. 낯을 가리느라 나오지도 못하는 부친과, 숨 쉬듯이 아들의 애인을 놀리는 모친이라니. 이든은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기존의 각오를 수정했다.
제정신으로 살아 나가자.
-라는 결심은 하라의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협탁 서랍을 여는 순간 불길한 운명을 맞았다. 일단 ‘제정신’이라는 부분부터 위기에 처해 버린 것이다.
“자.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니까 우선 이거부터 하자.”
그러면서 그녀가 꺼낸 건 커다란 조니 워커 한 병이었다. 그래. 소파 옆 협탁에 술을 두시는구나. 그래. 냉장고에 책이 있으면 협탁에는 술이 있을 수도 있지. 이든은 예상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상식을 초월한 대접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시점에서는 자기소개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마시다 보면 알아서 하게 되겠지. 술 잘 하는 편이니?”
술잔을 꺼내실 줄 알았으나 술병이 하나 더 나왔다. 이든은 눈치껏 잔을 찾다가 포기했다. 그래. 술잔이 아니라 술병으로 드시는구나. 그럴 수도 있지. 병이나 잔이나 사이즈의 차이일 뿐 액체를 담는 용기인 건 확실하니까. 오늘 하루는 간을 포기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든은 공손히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기꺼이 먹고 죽겠다는 뜻이었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마실 줄은 압니다.”
“어머.”
하지만 이든의 어머니는 그런 쪽에서는 상식인이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덥석 받으면 어떡하니? 처음 보는 사이에 술을 권하는데 못 마신다고 할 줄 알아야지.”
이든은 말수가 많지는 않아도 할 말은 다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과 장소와 상대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 감히 하라의 어머니에게, 그럼 처음 보는 사이에 술을 안 권하시면 되겠다며 톡 쏘는 소리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이든은 당황해서 텅 빈 손을 움츠릴 뿐이었다.
“그, 그것도 지금 제 입장에선 쉬운 일이 아니라...”
“그래도 할 말은 할 줄 아네.”
“제가 그래서 반했죠.”
이든에게 향하려는 술병이 하라에게로 넘어갔다. 하라는 자연스레 그 병을 받아들어 뚜껑을 열었다. 마치 여러 번 이런 일이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모자를 보고, 손목시계의 짧은 바늘이 5를 가리키는 걸 보면서, 이든은 설마 싶어 물었다.
“지금 술을 마시기엔 좀 이른 시간 아닐까요?”
“괜찮아.”
하라의 어머니가 시원스레 답했다.
“밤까지 마시면 되니까.”
“......”
너무나 합리적인 발언이었기에 이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하라의 어머니가 이든에게 술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자리에 이런 위치로 있다 보면 분위기를 위해 몇 잔은 마실 수밖에 없는 법이다. 게다가 이든은 두 사람이 각자 방으로 돌아간 뒤에 뒷정리까지 마쳤다. 덕분에 밤이 늦어서야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대충 씻은 뒤 바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 숙취랄 건 없었다. 별로 마시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익숙지 않은 잠자리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이든은 답지 않게 침대 안에서 잠시 스트레칭을 하며 머물렀다. 그러다보니 침대에서 일어난 건 평소보다 늦어진 뒤였다. 어차피 일찍 일어나도 할 일이 없는 터라 이든은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밀었다. 그러자 문에 뭔가 살짝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뭐에 걸렸는지 정체를 살피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헉.”
그건 분명 사람이 낸 소리였다. 하지만 확인할 겨를도 없이 사람으로 보였던 그 무언가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빠른지 이든이 눈으로 쫓기도 쉽지 않은 속도였다.
“...누구지?”
덜 깬 정신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멍하니 중얼거렸지만 다음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서 자신과 하라를 제외한 남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 뿐이지 않은가. 하라의 아버지 말이다. 이든은 서서히 몰려오는 충격으로 굳어졌다. 좋은 인상을 남겨도 모자랄 판에, 아침부터 방문으로 예비 장인을 후려치고 말았다. 그것이 그의 현 주소였다.
이후로 사과드리고 싶어 하라의 아버지를 열심히 찾았지만, 찾는다고 보였으면 이미 첫 날부터 인사를 나누었을 테다. 분명 가족의 일원일 어른이 어째서 마룻바닥까지 뒤져도 도통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는지 신기한 노릇이다. 사과드린다는 계획은 완전히 망했다. 이든은 아침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씹어 삼켰다. 딱딱하게 굳어진 이든을 알아챈 하라는 약간 걱정스런 기색이었으나, 하라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태연하게 물었다.
“아침 식사는 입에 맞니?”
“네. 맛있습니다.”
어머니의 질문에 이든은 입에 든 것을 삼키고 빠르게 답했다. 하라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물었다.
“그리고 아침에 우리 남편 봤지?”
“...역시 아버님이셨습니까?”
“그래. 너한테 인사하고 싶었다는데, 갑자기 나오니 깜짝 놀라서 도망쳤다지 뭐니. 그 사람도 참 낯가람이 심해. 한 시간이나 기다려 놓고선 한 마디 말도 못하고.”
...한 시간?
이든은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지만, 하라가 쐐기를 박았다.
“에드가 성실해서 한 시간 밖에 안 기다린 거라고 전해줘. 나였으면 아빠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걸.”
“......”
그렇다고, 한 시간 밖에 기다리셨다니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 리 없었다. 이든은 차마 팬케이크를 다시 집지 못하고 주스를 삼켰다. 하라의 아버지를 새벽부터 (아침 8시였지만) 한 시간이나 넘게 기다리게 하다니. 주스에 코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넘어갈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하라의 어머니는 이번에도 강렬한 한 문장을 던졌다.
“그래서 그 이가 미안하다고 아침 인사 대신 네 식사를 차려 주고 갔는데, 혹시 팬케이크 안 좋아하니?”
“저는 뭐든 잘 먹습니다.”
이든은 접시에 남아있던 팬케이크를 한 입에 전부 다 넣고 씹어 삼켰다. 무척 맛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과장된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진심으로 이든은, 설령 음식에 독이 들었대도 먹고 죽을 자신이 있었다. 접시의 시럽까지 싹싹 긁어 비운 뒤 이든은 간절한 심정으로 물었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한테 말해주면 그대로 전해줄게.”
“그럼 정말 감사히, 기쁘게 잘 먹었다고 전해주십시오.”
이든은 보이지 않는 허공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이상한 느낌에 잠시 사로잡혔다. 흡사 강령회에 온 거 같은 기분이다. 주변 사람을 휘어잡는 강력한 영매와, 그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딱 하라의 부모님과 같지 않은가. 이든은 무겁게 마지막 남은 주스를 입 안으로 흘려보내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일단 아버님께 사과드린 뒤, 제정신으로 살아 나가자.
도통 보이지 않는 하라의 아버지를 제외하고, 그들은 아침 식사 후 함께 산책을 했다. 말이 산책이지 그보다는 좀 더 길고 힘들긴 했다. 함께 장을 보고 이웃과 인사하고 하라가 가고 싶어 했던 식당에 들렀다 돌아오자 어느덧 늦은 오후였다. 영화 한 편까지 빈틈없이 감상하고 난 이후 하라의 어머니가 느닷없이 물었다.
“뭣 좀 마실래? 넌 주스 좋아하니?”
“아 예. 뭐든 잘 먹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딸기나 토마토 같은, 붉은 주스를 쟁반에 담아왔다. 하라의 집에 도착한 이후 거의 쉬지 않고 먹는 걸 보아하니, 과연 한국인들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챙겨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었으므로 이든은 조심스레 주스를 받아 들어 마셨다. 그리고 마시자마자 알아차렸다. 이 과일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쌉싸름하고 서늘한 맛은.
“...이건 주스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알코올도 있긴 하지만, 뭐든 과즙이 십 퍼센트 이상이면 주스지.”
이든은 미묘한 얼굴로 잔을 내려 보았다. 다행히 하라가 자신과 똑같은 심정을 토로했다.
“아니, 그래도 술이 구십 퍼센트에 가까우면 술이라고요. 다른 걸로 주세요, 제발. 저녁도 먹기 전에 술에 취하게 만들고 싶으세요?”
“워낙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긴장 좀 풀어주려고 한 거야.”
긴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이든은 입 밖으로 나가려는 바른말을 지그시 눌렀다. 확실히 이처럼 술 다음에 술 다음에 술이 나오는 패턴은, 익숙하지 않지만 하라의 어머니였다. 잘 보이고 싶었다. 어쨌거나 과일 향이 나는 술은 나쁘지 않다. 한 잔을 꿀꺽 마시자 하라가 걱정스레 바라보았으나 이든은 그저 웃기만 했다. 과일주는 빨리 취하니 천천히 마시라고 조언해준 하라의 어머니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혼인신고야 미국에서 하겠지만, 결혼식은 어디서 할 거니?”
“이든 부모님을 생각하면 미국에서 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비행기 타고 오시면 되니까 한국에서 해도 됩니다. 저희 집 부모님은 의견을 강하게 내지 않으실 거라, 하라의 부모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하고 싶다는데요, 여보?”
고개를 끄덕이던 하라의 어머니가 허공 어딘가를 보면서 불렀다. 이든은 잠깐 움찔하며 예의 바르지 못한 생각을 했다. 대화하다가 갑자기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평범한 대화 패턴은 아니었던 탓이다. 정말 강령회라거나 강령회 또는 강령회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영매를 통해서 하라의 아버지 유령이 강림하면 되는 건가, 싶었던 그 순간.
“여보는 어디서 하고 싶어요?”
하라의 어머니가 다시 한 번 허공에 대고 물었다. 그 허공을 몇 미터 쯤 건너 부엌 식탁 저편에서 낯선 인영이 삐죽 튀어나왔다. 이든은 안도하는 한편 의아해졌다. 대체 언제부터 저기 계셨단 말인가?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심지어 하라의 아버지는 부엌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물거리듯이 답했다.
“난 아무 데나 좋다.”
“하지만 아빠는 낯선 사람 많은 곳보다 한국이 낫지 않을까?”
“그래도 우리 의견보다는 양쪽 의견을 교환해서 해야지.”
“한국으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한국이 좋겠어요.”
이든은 진심으로 말했다. 결혼식 날 하라의 아버지가 사라졌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을 상상하자 머리가 아파진 탓이었다. 당장 결정할 건 아니었는지 하라의 식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윽고 눈치를 보던 하라의 아버지는 슬금슬금 이동하여 하라의 어머니 옆까지 다가왔다. 이든은 비로소 하라 아버지의 이목구비를 확인한 뒤 감개무량해졌다. 비록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계셨지만 어쨌든. 하라의 어머니가 어색함을 달래주려는지 그를 붙들어 앉히며 빙그레 웃었다.
“이쯤이면 나타날 줄 알았지. 아무리 당신이라도 하루를 굶으면 배가 고플 테니까요.”
하루를, 굶으면?
“....따로 챙겨 드신 게 아니라 그냥 굶으신 겁니까?”
이든의 물음에 하라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죄수도 아니고 방으로 가져다 줘서 먹기는 그렇잖니. 먹고 싶으면 나오라고 했지.”
그러고도 낯을 가리느라 만 하루쯤 지나서야 나온 것이다. 이든은 할 말을 잃었다. 낯선 사람과 함께 하느니 식사를 거르는 하라의 아버지나. 그걸 알면서도 식사를 가져다 주지 않는 하라의 어머니나. 어느 쪽이 더 대단한지 모르겠다만 가장 대단한 쪽은 확실히 알겠다. 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도 잘 자라준 하라다.
“저, 아버님-”
이든이 조심스레 하라의 아버지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하라의 아버지는 놀란 토끼눈을 뜨더니 황급히 거실을 빠져 나갔다. 남겨진 세 사람은 다시금 텅 비어버린 하라의 아버지 자리를 확인했다. 하라의 어머니가 침묵하다 엄숙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퇴로를 막고 구석에 몰아넣은 뒤 불러보렴.”
그런 행위는 부름보다 사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히 이래서야 하라의 아버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이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 혹시라도 마주친다면, 퇴로를 막고 구석에 몰아넣은 뒤 붙잡고 대화를 시도해야겠다.
하라나 하라의 어머니가 들었다면 과연 예비 가족이라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을 결심이었다.
*
오늘은 놓치지 않는다. 감상이, 예비 장인어른을 뵙는 마음가짐과는 미묘하게 어긋났지만 어쨌든, 남은 기간 동안 말이라도 섞어 보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이든은 평소 기상시간보다 한 시간 반 일찍 일어나 기다렸다. 지난 밤 마셨던 과일주 때문에 약간 속이 쓰렸지만 참아가며 여섯시 반부터 기다린 결과, 여덟 시를 오 분 남긴 시점.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든은 발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
“헉.”
막상 문을 열자 이든은, 자신이 할 말을 생각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아버님.”
슬그머니 문을 활짝 열어 복도를 점거한 뒤 옷소매까지 슬쩍 붙들었다. 이제는 도망치려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설마 도망치시려고, 하는 마음이 좀 있었지만 이든은 하라의 아버지 눈이 바쁘게 복도와 계단을 오가는 걸 보고 깨달았다. 퇴로를 막고 붙든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그래. 고맙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이든은 대체로 상대가 먼저 말문을 열길 기다리는 타입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소원이 통하지 않는 상대임을 떠올리고 어렵게 입을 뗐다.
“저... 괜찮으시다면, 아침을 함께 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방에 계속 계시는 것도 힘드실 텐데요.”
“아냐, 아냐. 괜찮아. 내 방에는 물도 많아서.”
“......”
설마 어제도 아침 대신 물을 마신 건 아니시길 바라본다. 이제 정말 절박해졌다. 삼박 사일 동안 장인을 굶겨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이든은 간절하게 다시금 애원했다.
“제발 함께 드셔 주십시오. 하라 씨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는 게 제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자네 소원이 참 소박하군...”
그러게나 말이다. 이든은 눈물을 삼켰다. 하라의 아버지를 ‘만나서’ ‘마주 보고’ ‘식사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 될 줄이야.
하지만 덩치 커다란 남자의 간절한 호소는 그 자체로 영향력이 있었다. 절박하게 애원하는 이든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건지, 아니면 원래 함께 식사하고 싶었지만 그저 붙잡아주길 기다렸던 건지는 모른다. 그래도 하라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애원한 보람이 있었다.
이든이 하라의 아버지를 앞세워서 (뒤에 두면 도망갈까 봐 두려웠다.) 계단을 내려오자, 미리 일어나 모닝커피를 즐기던 모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감탄했다.
“어머나!”
“우와!”
이든이 어색하게 웃으며 하라의 옆에 앉았다. 하라가 박수를 짝짝 치며 순수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에드 너 진짜 대단하다, 우리 아버지를 찾아낸 걸로도 모자라 식당으로 데려 오다니! 어떻게 했어?”
“그냥, 기다렸다가 부탁드렸습니다.”
그 사이에 숨겨진 긴장감과 탈력감에 대해서 서술하자면 꽤 할 말이 많았지만, 이든은 그저 그렇게만 말했다. 하지만 생략한대도 하라와 하라의 어머니에게 전해지는 감동이 덜하진 않았는지 그들은 과장된 몸짓으로 이든을 치하했다. 개중에서 이든을 가장 기쁘게 만든 말은 이것이었다.
“역시 우리 집 사람이야.”
하라의 어머니가 이든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제야 이든은 어떻게 섞여야 할지 고민했던 이 특이한 가족 속에 어느덧 들어와 있는 자신을 느끼고, 한결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하라의 부모님과는 휴가 일정이 미묘하게 어긋나, 그들이 다시 함께 식사하게 된 건 저녁 시간에 이르러서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하라의 어머니가 남편을 붙들어 끌고 왔기에 아침만큼 이든이 수고롭지는 않았다. 그들은 비교적 차분하게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었다.
단순히 숫자로만 헤아리면 하라의 아버지까지 한 명이 더 늘었지만, 저녁 식탁이 더 떠들썩해지지는 않았다. 하라의 아버지는 이든을 곁눈질하다 눈이 마주칠 때면 수줍게 접시를 밀어주는 것으로만 대화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사가 끝났을 때, 이든은 어느 정도 예감했던 그 일이 일어났다. 하라의 어머니가 가볍게 (라고는 하지만 분명 무거울) 반주 한 잔을 곁들이자며 일어나 거실 한구석의 바 앞으로 옮겨간 것이다.
은은한 조명만을 켜두자 제법 분위기가 잡히는 바 앞에서, 하라의 어머니는 자연스레 스툴에 걸쳐 앉았고 그러기로 미리 약속한 것처럼 하라의 아버지는 바 안으로 들어가 술을 잡았다. 하라의 어머니는 술잔을 꺼내며 진지하게 말했다.
“신혼집을 차린다면 꼭 기억해두렴. 집에는 바가 반드시 필요해.”
하라는 엄숙하게 답했고 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칵테일을 만들 줄 아는 남편도 필요해.”
“당연하죠.”
하라는 서슴없이 답했으나 이든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당연한 건가? 그런데 칵테일 만드는 법을 모르는데?
“꼭 배우겠습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이든은 진지하게 결심하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라의 어머니가 이든을 유심히 살피다가 살풋 웃었다.
“사실 내가 직접 만들 수도 있지만, 술 취한 상태에서 술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서 말이야. 누가 해주면 마실 때 흐름이 안 끊기고 좋지.”
“굳이 술 만드는 거 말고도 원래 취하면 뭐든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꼭 필요하단 뜻이야.”
듣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긁어대는 듯한, 핀잔에 가까운 말투였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을 보고 있는 탓일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달라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부드러운 눈빛들이 알려준다. 이든은 한결 편안한 기분으로 하라의 어머니를 바라보다, 그녀의 따뜻한 눈이 자신에게도 향하는 바람에 살짝 놀랐다. 그녀는 이든을 향해 잔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눈을 찡긋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랑 술 마시는 건 즐거운 일이지.”
“맞아요. 좋은 사람하고 마시면 술이 더 잘 넘어간다니까요.”
하라가 맞장구치면서 막 만들어진 칵테일을 들이켰다. 한 모금에 술잔 절반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이 두 사람이라면 혼자 있어도 술을 잘 마실 것 같긴 했지만, 이든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뭐든 잘 넘어가지 않겠는가. 술이든, 시간이든.
“이거 들게.”
“감사합니다.”
하라의 아버지가 이든의 앞에 칵테일 잔 하나를 내밀었다. 이든은 받아서 한 입 마셔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엊저녁 하라의 어머니가 내주었던 조니 워커를 각오했지만 정작 느껴지는 알코올 양은 미미했다.
“술이 아니군요?”
“아주 약하게 넣었어. 나도 술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거든. 굳이 따지면 저 사람이 마시는 걸 보조해주는 걸 좋아하지.”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낯을 가린다는 이유로 보이지도 않을 때는, 솔직히 사회성 부족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막상 대화는 잘 이어졌다. 비슷한 사람을 옆에 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라의 아버지는 능숙하게 칵테일 잔을 정리하고 닦으며 웃었다.
“어쨌든 내 사람이 즐거우면 나도 즐거우니까.”
맞는 말씀이었다.
그가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 그가 사랑하면 나도 사랑한다. 각자의 감정이 이렇게 엮여서 같은 빛을 띠는 게 신기할 수밖에 없도록, 사랑하고 있다. 이든은 술병 너머에서 수줍어하는 하라의 아버지를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없는 떠들썩함을 사랑하는, 그런 감정을 공유하게 된 사람들의 시선 교환이었다.
*
저녁 식사 이후로는 연인들의 시간이었다. 아무리 술을 좋아한다고는 하나 사흘 내리 손님을 접대하는 게 쉬울 리 없었던 덕이라고 해야 할까. 부쩍 피곤해하는 하라의 어머니를 챙겨 사라진 하라의 아버지 덕에, 이든과 하라는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딸딸할 정도로 올라오는 취기를 몰아내기 위해 정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이든은 술 때문에 열기가 오르는 하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하라의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그가 마셨던 칵테일의 은은한 향이 코끝에 맡아졌다. 이든은 잠깐 그 향기에 취했다. 같이 자지 못했을 뿐 분명 하라와 함께 있었는데, 왠지 아주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었다.
그런 마음을 읽은 듯, 하라도 밤하늘을 보던 눈을 돌려 이든에게 향했다. 그는 술기운으로 붉어진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내일이면 집에 가네. 계속 기다렸는데 드디어 내일이 왔어.”
이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름휴가 내내 하라는 유쾌하게 웃었고 그의 부모님과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것이다. 집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태도여서 며칠 더 머무르는 것도 고려했던 이든으로선 놀랄 말이었다.
“기다렸다니요. 하라 씨는 부모님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 이 나이 되어서 부모님이랑 내내 붙어 지내는 건 좀 그렇지.”
하라가 손을 내저으며 질색하더니, 이든과 눈을 마주치고 깊은 미소를 지었다.
“에드 너랑 같이 지내는 우리 집 쪽이 더 좋아.”
이든은 하라를 잠시 바라보았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요 며칠 확실해졌다. 역시 사랑 받으며 자란 화목한 가정 태생이다. 그의 부모님이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사흘 동안 절절히 느꼈다. 두 손으로 받아 쥐기도 버겁게 흘려졌을 커다란 애정들. 어딘가 가라앉고 묵직한 집안 분위기 쪽이 익숙한 자신과 다르게, 이 집에서 그는 행복한 추억만 가득했을 것이다. 결여된 부분 없이 완벽하게 자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과 함께 있는 집이 더 좋다고 말한다. 우리 집. 이든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집. 하라와 함께 사는.
“그럼 이제 슬슬 방으로 갈까.”
마침 하라가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이든은 자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라는 잡아당기는 손을 이기지 못해 다시 끌려 왔다. 손으로는 암만 세게 쥐어도 모자라, 이든은 하라를 힘껏 품에 안았다. 순간 아득한 포만감이 몰려 왔다. 이든은 하라의 검은 머리카락을 쥐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라는 포옹을 밀어내진 않았으나 의아한 눈치였다.
“왜 이래?”
“오늘 밤은 함께 보내요.”
이든이 빙그레 웃으며 하라의 손가락 사이 깍지를 끼었다.
“기왕이면 앞으로도 계속.”
*이든 다니엘x성하라 커미션
*여름휴가를 맞아 하라네 집으로 상견례를 간 이든의 시점입니다.